문득, 중국의 임제 선사가 한 말이 떠오른다.

길을 가다가 검객을 만나거든 자신의 검을 보여주되,
그가 시인이 아니거든 자신의 시를 보이지 말라.

근데 만일, 그가 검객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라면, 그냥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지나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우리의 삶은 즉흥성과 우연성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한번 찬찬히 돌이켜 보면 수긍 가는 면이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러한 삶의 모습을 영화에 담고자 했을 때, 사전 시나리오와 철저한 콘티에 의하여 작업을 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신이 자신의 삶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삶에 대해 매우 거만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지금 살고 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조금씩 알아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영화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영화가 무엇인지 알고 나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영화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찾고 고민한다는 이야기다. 먼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나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마치 백지상태처럼 머리 속을 텅 비우고 영화를 만들어 보자. 이런 식의 작업방식은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 라는 말처럼, 자기 내부에서 영화의 역사를 반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고 본인은 믿는다.

주제를 미리 정하고 그 주제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사전 준비에 의해 촬영하고 편집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것들을 한번 의심해 본 적은 없는가?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친구의 권유로? 신문 및 잡지의 광고를 보고?
영화는 태어난 지 100년밖에 안 된 예술이고 보면, (물론 <영화발생지연설>이라고 해서 영화의 기원을 알타미아 동굴벽화까지 끌어올리는 경우가 있지만), 아무튼 지금은 영화의 발생기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고, 만일 그렇다면 아직 영화에 대해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설사 이미 정해진 것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이고, 한시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런 것들은 반드시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그러해 왔던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 편의상 만들어진, 인간정신의 의식적인 구성물에 불과한 것이다.

기존의 의미들을 잠시 유보하고,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두기.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의 옷을 입으며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냥 옆에서 지켜보기. 그리고 나중에 그것들을 정리하기. 그 다음에 그것을 다시 내버려두기.
재미있는 작업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철학은 당대의 과학적 성과를 받아들이며 발전해 왔다. 17세기 인식론자들이 자신의 논리를 진행시키는데 있어, 당대의 '질량보존의 법칙'이나 '운동량 보존의 법칙'의 증명여부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된 것이 사실이며, 또한 원자핵물리학의 발달이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을 생겨나게 한 것도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하물며 철학도 그러한데 영화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가벼운 카메라의 개발이 핸드헬드라는 새로운 기법을 낳았듯이, 기자재의 발달은 그대로 새로운 영화문법의 탄생으로 이어져 왔다. 그렇다면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기존 영화에 일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어떤 명제가 정리(定理)가 되는 일은 그 명제를 참이게끔 해주는 어떤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정리(定理)란 참인 명제를 말하는데, 여기선 편의상 진리라는 말로 바꿔 사용하겠다.) 그래서 참이게끔 해주는 그 <조건>이 바뀐다면, 이전에는 진리였던 것이 더 이상은 진리가 아닌 것이 될 수도 있고, 이전엔 진리가 아니었던 무엇이 새로이 진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은 바로 그러한 <조건>들이 변화하고 있는 시기라는 것이다.
어떤 명제가 어떤 조건하에서 참이 되는가, 그 조건을 고민하는 것이 메타논리학이듯, 영화에 있어서도, 어떤 영화적 명제가 진리가 될 수 있게끔 해 주는 그 조건들에 대한 고민을 메타적으로 해 보아야 하는 시기라는 말이다. 사실 영화적 조건들은 이미 변하고 있고, 그 대표주자가 바로 디지털카메라와 디지털편집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불교의 대중화에 이바지했듯, 이제 디지털대사는 영화의 대중화에 기여할 것이다. 이것은 곧 영화의 민주화의 첫걸음이 아닐까? 영화라는 것은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대단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일상 앞에 카메라를 세워 두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일상은 곧 영화가 될 수 있다. 영화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마라. 그런 통념을 거부하라. 우리들 삶이라는 것이 사실 남루하기만 할 뿐 별반 매력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런 삶을 담는 영화도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본다.
상식을 거부하고 통념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만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자들도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더 이전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도 새로운 것을 사용하면서 더 새롭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부하는 이율배반적 상황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곧 일상의 혁명, 즉 구체성의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굳어져버린 우리의 생활세계를 한번 혁명해 보는 것이다. 마음이 설레지 않는가?

모든 영화적 윤리를 거부하라!
그리고 자기 안에서 영화의 역사를 반복하라!


2001. 5. 14 / 이정수 (thisbug@freechal.com)